늦여름의 땡볕이 한결 부드러워지고, 아침저녁의 바람에서 서늘함이 묻어날 때 우리는 ‘처서(處暑)’의 문턱을 넘어섭니다. 더위가 한풀 꺾이는 시기라는 뜻처럼, 자연은 소리 없이 절기의 책장을 넘기고 있습니다. 연일 우렁차게 노래하던 매미의 소리도 서서히 잦아들면서 여름의 기세가 물러나는 자리에, 가을의 기운이 불현듯 스며드는 것을 느낍니다. 인생에도 이런 ‘처서’의 순간이 있습니다. 열정과 야망이 가장 뜨겁던 시절이 지나고, 차분히 자신을 성찰해야 할 때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즉 처서를 지난다는 것은, 열정의 강물이 조금씩 잔잔해지며, 그 물속에 비친 하나님의 얼굴을 더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때를 맞이하는 일인 것입니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벼가 익어가듯 우리 영혼도 침묵과 인내의 계절을 지나며 성숙해집니다. 비단 뜨거운 햇볕 아래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또한 서늘한 바람 속에서도 알곡이 단단해지듯이, 신앙은 열정과 고요함이 교차하는 리듬 속에서 완성되어갑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단번에 성숙하게 하시기보다, 사계절을 돌듯 다양한 시간과 기후를 지나도록 이끄십니다. 이제 우리는 조용히 익어감의 시간을 허락받았습니다. 바람에 고개를 숙이는 벼 이삭처럼, 주님의 은혜 앞에 겸손히 자신을 내려놓을 때, 우리 영혼은 가을 곡식처럼 빛나는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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