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4]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1. 아버지에 대한 ( 부정적인 ) ( 오해 )가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는 인간의 끊임없는 방황 끼, 방랑 끼가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을 떠나가려고 합니다. 왜 떠나가려고 할까요? 보통 집을 떠나려는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아버지가 마음에 안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있습니다. 즉 아버지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살아본다”는 욕구가 집을 떠나가게 합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오해했습니다. 반면 자기가 가출하는 것은 아주 모험적이고, 도전적이고, 자아의 성취로 생각하고 집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에도 둘째 아들과도 같이 예수 믿는 것이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억압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 아버지에 대한 ( 실망감 )과 ( 분노 )가 있습니다.
그런데 집을 떠나지 않았던 첫째 아들도 정신적으로는 떠나갔음을 드러냅니다. 그의 마음이 아버지로부터 떠나있습니다. 몸은 집에 있지만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고 자기 마음대로 다른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오늘 탕자의 비유에 대해서 집안에 있는 탕자와 집을 떠난 탕자가 있었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그렇게 환대하는 아버지의 태도에 엄청난 좌절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순간 큰 아들은 분노하게 됩니다. 사실 큰 아들은 동생에 대해서 분노를 터트리기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터트리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이 섭섭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성실한 모습을 전혀 몰라주고 단 한 번도 격려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동생을 환대했기 때문입니다.
3. ( 자신 )과 ( 동급 )으로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을 탕자와 동급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와 동급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니까 큰 아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작은 아들과 같은 자리에서 시샘하고 억울해 할 것이 아니라, “아비와 동급의 자리에서 작은 아들을 보자”고 하십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은 큰 아들의 모습 속에서 오늘 우리들에게 항변을 하고 계신지 모릅니다. 후속 이야기가 나와 있지 않지만, 큰 아들이 기꺼이 아버지의 청에 순종하며 함께 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물론 자신의 마음에 흔쾌히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자신의 의지를 꺾는 순종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어떤 순종이든지 그곳에는 희생이 요구됩니다. 큰 아들의 순종이 없다면 그 잔치는 결코 화목할 수 없습니다.
관련링크
- 이전글[05.21]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 17.05.21
- 다음글[05.07] 여기 한 아이가 있어 17.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