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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03.31]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 설교자 | 김봉성 담임목사
  • 설교일자 | 2024. 03. 31.
  • 말씀본문 | 요한복음 20:10~18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요한복음 20:10∼18)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시작은 십자가 아래에서부터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빈 무덤에서부터였습니다.


1. 건강한 믿음은 (맹신)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8절에서 요한이 ‘들어가 보고 믿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본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못 보고 믿은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을 싸맸던 수의가 있었고, 머리를 싸맸던 수건이 한쪽에 개켜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걸 그냥 본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며 본 것’입니다. 누가 훔쳐 간 것도 아니고, 스스로 살아서 나간 것도 아니라면,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요한에게는 제3의 가능성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즉 예수께서 생전에 말씀하시던 그러나 그게 무엇인지 전혀 추측할 수가 없는 바로 그 사건, 부활이라고밖에는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진지하게 질문하고 답하는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2.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고 그 안에 남겨진 단서들을 보고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만으로는 마음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는 우리의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표정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에 더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역사적인 사실로서 믿는 것으로는 내 삶이 변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부활의 현실이 내 삶 속에 뚫고 들어와야 합니다. 그럴 때, 부활의 소식은 나에게 복음이 되며, 희망이 되며, 생명이 됩니다. 그 만남의 사건이 있어야만 부활의 능력이 내 삶 속에 뚫고 들어와서 그 능력을 드러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만남은 “마리아야!”라고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깨닫고는 “랍오니!”라고 응답하는 대목입니다.


3. 교회는 (신앙)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자들에게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부활의 사건보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에 더 강조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성경 속 믿음의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곧바로 세상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먼저 정기적으로 교회에 모여, 세상에 나아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일할 준비를 합니다. 교회는 이 훈련을 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종착역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 바깥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아 우리 자신을 조용히 되돌아봅시다. 우리는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주님께서 당신의 몸을 드려 교회를 세우신 것은 그 안에서 우리를 훈련시켜 이 세상으로 내보내기 위함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