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오늘 설교 제목은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향하여 나오는 나다나엘을 보고서 하신 말씀입니다.
1. 자신의 ( 편견 )을 깨뜨려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메시야에 대한 편견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그는 그 편견을 넘어 예수님에게로 나갔습니다. 아무리 나다나엘이 그렇게 진실한 사람이었고 경건한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만약에 그가 “나사렛 사람이 어떻게 메시야일 수 있느냐?”는 이런 자기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면 결코 예수님을 만날 수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님을 향하여 나오는 나다나엘을 보고 참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가셨음에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모셔들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율법에 대하여 잘 알고 지키고 있다고 하는 율법학사들과 바리새인들이 더욱 그랬습니다. 오늘 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그릇된 편견을 가지고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옳다고 여기는 것을 꺾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드러내 놓고 보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보다 더 (우선) 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의 자녀일까?" 이런 질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명확한 기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0:27절에 따르면 즉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사람이 예수님의 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자신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아직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대해서 어려워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에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를 따른다고 했습니다. 그 때 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순종에 열쇠가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힘들게 여기시면 “나는 주님의 음성으로 깨달은 것에 대해서는 순종을 했는가?”하는 것을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3 ( 옳고 )( 그름 )이 아니라 어떤 ( 영 )이 역사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오늘 나다나엘을 향하여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이 듣기에 거북한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가장 순수한 이스라엘의 혈통이라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곤 하였습니다. 한 예로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어느 날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께로 끌고 와 “율법대로 처단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율법 계율을 잘 아셨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율법의 정신을 따라 그 여인을 살리셨습니다. 그것은 이미 바리새인들 마음에는 ‘죽이려는 영’이 역사하고 있었고, 예수님 안에는 ‘살리는 영’이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간음죄를 지은 여인을 두고 두 가지 영적인 힘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하나는 죄로 인하여 그녀를 죽이려는 힘입니다. 또 하나는 그녀를 살리려는 힘입니다. 이 두 가지 영적인 힘은 지금 우리에게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1. 자신의 ( 편견 )을 깨뜨려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메시야에 대한 편견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그는 그 편견을 넘어 예수님에게로 나갔습니다. 아무리 나다나엘이 그렇게 진실한 사람이었고 경건한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만약에 그가 “나사렛 사람이 어떻게 메시야일 수 있느냐?”는 이런 자기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면 결코 예수님을 만날 수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님을 향하여 나오는 나다나엘을 보고 참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가셨음에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모셔들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율법에 대하여 잘 알고 지키고 있다고 하는 율법학사들과 바리새인들이 더욱 그랬습니다. 오늘 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그릇된 편견을 가지고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옳다고 여기는 것을 꺾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드러내 놓고 보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보다 더 (우선) 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의 자녀일까?" 이런 질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명확한 기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0:27절에 따르면 즉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사람이 예수님의 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자신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아직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대해서 어려워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에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를 따른다고 했습니다. 그 때 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순종에 열쇠가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힘들게 여기시면 “나는 주님의 음성으로 깨달은 것에 대해서는 순종을 했는가?”하는 것을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3 ( 옳고 )( 그름 )이 아니라 어떤 ( 영 )이 역사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오늘 나다나엘을 향하여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이 듣기에 거북한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가장 순수한 이스라엘의 혈통이라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곤 하였습니다. 한 예로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어느 날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께로 끌고 와 “율법대로 처단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율법 계율을 잘 아셨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율법의 정신을 따라 그 여인을 살리셨습니다. 그것은 이미 바리새인들 마음에는 ‘죽이려는 영’이 역사하고 있었고, 예수님 안에는 ‘살리는 영’이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간음죄를 지은 여인을 두고 두 가지 영적인 힘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하나는 죄로 인하여 그녀를 죽이려는 힘입니다. 또 하나는 그녀를 살리려는 힘입니다. 이 두 가지 영적인 힘은 지금 우리에게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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