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큰 사랑을 인하여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항상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에 대하여 세 가지의 이미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죽은 자로서 아무 반응이나 감각이 없는 ‘시신의 이미지’입니다. 예수 믿기 이전에는 감각이 없었습니다.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이 세상의 풍조와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끌려 다니는 ‘노예의 이미지’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세 번째는 본능의 욕망만을 따라 사는 ‘사로 잡혀있는 자’의 이미지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처음부터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였습니다. 이와 같이 죽은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제 아무리 능력자라도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2.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해방)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해방되었습니다. 이 모든 이미지들로부터 우리가 해방되었습니다. 어떻게 해방되었습니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해방된 것입니다. 우리가 애쓰고 노력한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으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측은히 여겨서 돌봐주십니다. 반면에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는 말은 “아주 정당하게 대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면서 돌봐 주셔야지 정당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계산 하시면 우리가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풍성함이 우리에게 큰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냥 사랑이 아닙니다. 큰 사랑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큰 사랑을 누리는 삶을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3. 우리는 그 (큰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가 우리의 삶의 자리입니다. 선한 일을 위하며 지으심을 받았고, 부름을 받은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셨고, 큰 사랑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풍성하신 큰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고 실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려면 어떻게 미워하는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과 친밀해지는 눈이 열려야 가능한 일입니다. 열쇠는 언제나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진정 예수님의 사람임을 증명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으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오직 하나 우리의 삶으로 사랑을 보여주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1.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에 대하여 세 가지의 이미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죽은 자로서 아무 반응이나 감각이 없는 ‘시신의 이미지’입니다. 예수 믿기 이전에는 감각이 없었습니다.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이 세상의 풍조와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끌려 다니는 ‘노예의 이미지’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세 번째는 본능의 욕망만을 따라 사는 ‘사로 잡혀있는 자’의 이미지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처음부터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였습니다. 이와 같이 죽은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제 아무리 능력자라도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2.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해방)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해방되었습니다. 이 모든 이미지들로부터 우리가 해방되었습니다. 어떻게 해방되었습니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해방된 것입니다. 우리가 애쓰고 노력한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으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측은히 여겨서 돌봐주십니다. 반면에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는 말은 “아주 정당하게 대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면서 돌봐 주셔야지 정당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계산 하시면 우리가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풍성함이 우리에게 큰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냥 사랑이 아닙니다. 큰 사랑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큰 사랑을 누리는 삶을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3. 우리는 그 (큰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가 우리의 삶의 자리입니다. 선한 일을 위하며 지으심을 받았고, 부름을 받은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셨고, 큰 사랑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풍성하신 큰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고 실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려면 어떻게 미워하는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과 친밀해지는 눈이 열려야 가능한 일입니다. 열쇠는 언제나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진정 예수님의 사람임을 증명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으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오직 하나 우리의 삶으로 사랑을 보여주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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