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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큰 아들이 참여해야 잔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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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씀본문 | 누가복음 15:29∼32

큰 아들이 참여해야 잔치가 됩니다! (누가복음 15:29∼32)

  오늘 본문인 탕자의 비유는 미완성의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탕자를 위해 아버지가 베푸는 잔치에 큰 아들이 아직 참여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은 (큰 아들)을 자신과 (동격)으로 이해하십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큰 아들의 태도가 정말 악하고 잘못 되었다면 심하게 꾸짖어야 하는데, 아버지는 큰 아들을 꾸짖기보다는 부드럽게 권하여 말합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반응으로 보건데 지금 아버지는 큰 아들을 탕자와 동급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보단 아버지인 자기 자신과 동급으로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32절에서는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선언이 이어집니다. 아들과 자신을 ‘우리’라고 말합니다. 즉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은 큰 아들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항변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특히 로마서 8장 29절에서는 예수님을 구원받은 자들 중에서 맏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큰 아들의 생각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저런 나쁜 놈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내가 같이 기뻐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시던 그 마음이 바로 이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2. 악인의 (형통함)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은 탕자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민하셨던 것처럼, “저런 인간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나?”라는 의문을 우리는 실제로 늘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특히 ‘악인의 형통함’은 우리로 하여금 견딜 수 없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지금 눈으로 보는 이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악인이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기와 하나님이 생각하는 시기가 다를 뿐이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결과가 반드시 우리의 눈 앞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는 악인을 처벌하시는 것이 그 인간의 죽음 이전이나 이후나 동일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악인의 형통함을 불쌍히 보아야 합니다.

    3. (잔치)에 기꺼이 참여하는 (큰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다음의 이야기가 나와 있지는 않지만, 저는 큰 아들이 기꺼이 아버지의 권면에 순종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만약 큰 아들의 이러한 순종이 없었다면 그 잔치는 결코 진정한 잔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도 큰 아들이 심술을 부린다면 깨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아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즉 진정으로 흥겨운 잔치가 되려면 거기엔 반드시 큰 아들의 참여가 전격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했었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미완성의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끝맺는 이유는 “이제 그 미완성을 읽은 우리가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잔치에 기꺼이 참여하는 큰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자신의 고집을 꺾고 화목제물로 참여하는 큰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