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효도
예수님의 효도 (요한복음 19:25∼27)
오늘은 어버이주일로 지키면서 참된 성경적인 효도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1. 성경은 언제나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공경하라’는 히브리어 ‘카베드’는 “무겁다”는 뜻으로, 즉 “공경한다”는 것은 “무게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신 부모님께는 우리가 도저히 흉내내거나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무게, 경륜과 인생의 무게가 있는 법입니다. 바로 그 무게를 인정하는 것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 무게를 인정하면 귀히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부모님 인생의 무게를 존중한다는 것은 자식으로써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품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요, 만약 이 긍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부모님의 무게를 인정하기는 커녕, 깃털보다 더 가벼이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효도란 “함께 모시고 사느냐 아니냐, 용돈을 얼마나 드리느냐, 얼마나 호강을 시켜 드리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참된 효도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주신 부모님에 대한 긍지 여부에 따라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최고의 (긍지)로 효도를 다하셨습니다.
26절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십자가에서 모친 마리아에게 “여자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요한을 가리켜 “앞으로 요한을 양아들로 삼으라”는 의미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 자신이 아들이란 말인지, 아니면 사도 요한이 아들이란 말인지를 밝혀줄 주어와 동사가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본문의 아들을 사도 요한과 예수님 둘 중 어느 쪽으로 번역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어머니 마리아가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동정녀 처녀의 몸으로 당신을 잉태하고, 당신을 낳고, 당신을 키워 주었기에, 하나님의 독생자로 이 땅에 오시어 그리스도로서 구원의 사역을 완수할 수 있었다”는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예수님의 최고 긍지의 대선언이었던 것입니다.
3. 이 세상에서 최고의 효도는 (성경적)으로 효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효’라고 하면 유교만 생각합니다. 공자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효의 원조는 하나님이십니다. 효의 원조는 성경인 것입니다.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게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주셨던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찾으십시오. 비천한 달동네 나사렛 출신의 마리아가 단지 “주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의 최고 긍지가 되듯이, 우리의 부모님이 아무리 늙고 병들고 볼품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치밀하신 섭리에 의해 우리 부모님이 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긍지가 될 충분한 자격을 이미 갖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해 이 긍지를 갖고 있는 한, 설령 남들에게는 불효처럼 보이는 행동도 그 본질은 사실 효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긍지를 갖지 못한 자식이라면, 그가 부모에게 행하는 것들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또 다른 불효의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로 지키면서 참된 성경적인 효도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1. 성경은 언제나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공경하라’는 히브리어 ‘카베드’는 “무겁다”는 뜻으로, 즉 “공경한다”는 것은 “무게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신 부모님께는 우리가 도저히 흉내내거나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무게, 경륜과 인생의 무게가 있는 법입니다. 바로 그 무게를 인정하는 것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 무게를 인정하면 귀히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부모님 인생의 무게를 존중한다는 것은 자식으로써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품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요, 만약 이 긍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부모님의 무게를 인정하기는 커녕, 깃털보다 더 가벼이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효도란 “함께 모시고 사느냐 아니냐, 용돈을 얼마나 드리느냐, 얼마나 호강을 시켜 드리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참된 효도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주신 부모님에 대한 긍지 여부에 따라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최고의 (긍지)로 효도를 다하셨습니다.
26절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십자가에서 모친 마리아에게 “여자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요한을 가리켜 “앞으로 요한을 양아들로 삼으라”는 의미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 자신이 아들이란 말인지, 아니면 사도 요한이 아들이란 말인지를 밝혀줄 주어와 동사가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본문의 아들을 사도 요한과 예수님 둘 중 어느 쪽으로 번역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어머니 마리아가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동정녀 처녀의 몸으로 당신을 잉태하고, 당신을 낳고, 당신을 키워 주었기에, 하나님의 독생자로 이 땅에 오시어 그리스도로서 구원의 사역을 완수할 수 있었다”는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예수님의 최고 긍지의 대선언이었던 것입니다.
3. 이 세상에서 최고의 효도는 (성경적)으로 효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효’라고 하면 유교만 생각합니다. 공자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효의 원조는 하나님이십니다. 효의 원조는 성경인 것입니다.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게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주셨던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찾으십시오. 비천한 달동네 나사렛 출신의 마리아가 단지 “주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의 최고 긍지가 되듯이, 우리의 부모님이 아무리 늙고 병들고 볼품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치밀하신 섭리에 의해 우리 부모님이 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긍지가 될 충분한 자격을 이미 갖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해 이 긍지를 갖고 있는 한, 설령 남들에게는 불효처럼 보이는 행동도 그 본질은 사실 효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긍지를 갖지 못한 자식이라면, 그가 부모에게 행하는 것들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또 다른 불효의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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