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7]일곱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마태복음 18:21∼35)
오늘 말씀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용서는 까다롭고 불편한 주제입니다.
1.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용서)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은 그 당시 제자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세 번까지 용서하고, 네 번째는 용서해 주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만 남을 용서하라”고 하신 말씀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나를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용서하신 말씀이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 속에서 490번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더 나가 영원 속에서 1000번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한 경점에도 못 미치는 것입니다.
2. 성도는 (영원토록) 서로 (축복)하는 관계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한 질문은 이방인이나 불신자를 대상으로 해서 했던 질문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분명하게 ‘형제 중’이라고 제한하였습니다. 또 본문의 배경과 흐름은 앞에서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가?’로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도 간의 관계를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불신 가족과의 관계보다도, 불신 남편이나 아내, 자식과의 관계와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남을 얼마만큼 용서하고, 얼마만큼 사랑하고, 얼마만큼 축복하고 있습니까? 또 하늘나라 가족인 성도 간에는 어떻습니까? 용서는 가나안 땅에 속한 영적인 재산입니다. 이 말은 홍해를 건넌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는 말입니다. 용서는 인간이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들이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체험하고 홍해를 건넌 사람 즉 가나안에 거하는 자들이 할 수 있습니다.
3. 우리는 용서의 (주체)가 아니라 용서의 (대상)입니다.
자신은 왕에게 엄청난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아 놓고 정작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고 “돈 갚으라!”며 닦달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도대체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와 무슨 상관일까요? 그것은 “엄청나게 큰 내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비유는 용서하는 자와 용서받는 자를 교차시킵니다. 즉 용서를 권력으로 생각한 베드로를 보좌에서 끌어내립니다. 보좌에서 끌어내려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거리의 교차로에 세웁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는 자로 부르시지만, 그러나 거기는 높은 보좌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용서받아야 할 자의 자리로 또다시 부르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영원 속에서 490번이라도 용서받아야 할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이 점을 명심하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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