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0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오늘 본문은 그 유명한 한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와의 대화로 거듭남과 영생이 그 주제입니다.
1. 본문은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갈등을 배경으로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교 산헤드린 관원인 니고데모와 예수님 사이에서 거듭남에 대한 논쟁은 합의에 이르지는 못하였는데, 이 이야기는 단순히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개인적인 논쟁에 국한되지 않고,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신학적 논쟁을 내포하고 있는 본문으로 평가합니다. 그렇게 볼 때, 11절에서 ‘우리’란 바로 초대교회 즉 기독교를 대변하고, ‘너희’는 다름 아닌 유대교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여러 표적을 보았어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고 표적도 보았지만 정작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반(反)기독교적인 정서는 요즘 우리 한국교회에 있어서도 유사합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대부분 기독교를 암묵적으로 또는 공개적으로 지지했지만, 지금은 공공연하게 대적합니다.
2. 구원의 진정한 (표적)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들에 매우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기적을 이룬 사람으로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명사의 반열에 오른 기적의 사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대개 자기는 변하지 않으면서 자기 주변의 환경이 기적적으로 바뀌어서 행복해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 사람의 내면이 바뀌지 않으면서 외적인 조건만 바뀌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 너 자신이 거듭나는 것이 바로 표적이요 기적이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네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진정한 표적은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표현한다면 사람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3. 구원은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유대인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시며 구원의 핵심 키(key)로 모세의 놋뱀을 말씀하십니다. 놋뱀을 쳐다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났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린 인자, 나 예수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떤 고통을 당하셨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가 반드시 갖기를 원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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