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5]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본문은 세례요한과 두 제자가 예수님을 점점 더 알아가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오늘 우리도 이들처럼 예수님을 점점 더 잘 알아가기를 바랍니다.
1. 우리는 (알지) 못하고 받는 (사랑) 가운데 살아갑니다.
본문을 읽고 묵상하다가 생선 가시처럼 걸리는 문장이 있어서 그 구절을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1장은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엄청난 사랑이 있었다”고 선포함으로 시작됩니다. 그 사랑은 캄캄한 온 세상을 환하게 밝혀 주는 빛과 같은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가득 담긴 사랑이었습니다.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도 예수님의 실체를 은혜와 성령의 도움으로 깊이 깨닫기 전에는 잘 모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과 친척이었지만 예수님의 실체를 몰랐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서로 잘 알았으나 예수님의 영적인 실체와 본질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성령 체험을 통한 예수님에 대한 앎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2.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세례 요한은 그 당대 사람들로부터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 오시기로 한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아무리 메시아처럼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세례 요한은 절대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철저히 예수님만을 드러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다 나중에는 자기 제자들까지 예수님에게로 보냅니다. 우리도 이렇게 예수님만을 앞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만을 높이고 앞세우기를 원한다면, 먼저 잠잠하게 있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발견을 합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랍비’에서 ‘메시야’로 변화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39절에서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단순한 랍비가 아니라 메시야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의미를 세례 요한을 통하여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의미를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산다는 의미는 주님을 주님으로 제대로 안다는 말입니다. 같이 살지 않으면 제대로 모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며 예수님을 잘 드러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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