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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10.20]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 설교자 | 김봉성 담임목사
  • 설교일자 | 2019. 10. 20
  • 말씀본문 | 누가복음 18:1~8

오늘 본문의 불의한 재판장과 억울한 과부의 비유는 끈질긴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한다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여도 (원한)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끈질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부처럼 기도하는 것이 어떠한 기도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떼쓰듯이 하는 강청하는 기도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기도의 방식에만 몰두할 뿐, 그 기도의 동기와 목표 그리고 기도의 내용에 대해 성찰을 하지 않는다 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강청기도는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에만 관심을 두었지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 소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서 과부가 재판관에게 가서 어떻게 탄원을 했는가 보다는, 그가 ‘무엇을’ 탄원했는가에 주목하여 보아야 합니다. 특히 ‘원한’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엨디케소’(ἐκδικήσω)라는 동사로 영어 성경에서는 이를 모두 다 ‘justice’ 즉 ‘정의’로 번역하였다고 하는 점입니다.

 

2. (불의한) 세상에서 (정의)를 세우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과부가 단순히 개인적인 욕망이나 욕심의 차원에서 끈질기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파악해야 합니다. 사회 구조적으로 약자들이 소외당하는 현실 속에서, 힘없고 가난한 과부가 그것도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찾아가서 그녀의 억울한 사정을 탄원했다는 것은, 단지 개인적인 곤경과 어려움의 원한을 하소연하는 기도,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 마지막 절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인자’라는 표현은 세상의 마지막 때 심판자로 오실 예수님을 가리키는 묵시 문학적인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욕망을 구하는 것이 아닌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믿음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하신 것입니다.

 

3. 우리도 거룩한 (원한)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억울한 환경 속에서 많은 사람이 낙심하고 좌절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과부는 인자의 때까지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기도를 무기로 정면 돌파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기도를 쉽게 생각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냉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로 기도하는 이들은 다 공감하겠지만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본성을 거역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시간에 차라리 무엇인가 행동해야 할 것 같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래서 믿음과 순종이 없다면 기도를 시작할 수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