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7]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시민권을 하늘에 두는 사람들로 이중 국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하늘) 시민권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중 국적자는 때로 소속감이 확실하지 않아서 그 어느 쪽에도 충성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또 이편이든 저편이든 자기 편리에 따라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전체 배경과 함께 살펴볼 때, 자기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경계하여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확신케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포함한 그동안 자랑거리였던 것들을 다 해로운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런 것들로 인한 권리나 특권을 누릴 수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은혜에 대한 믿음을 훼손시키기 때문입니다. 구원과는 관련이 없는 잘못된 믿음의 착시 현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2. 하늘 시민권의 보증은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그러면 하늘 시민권에 대한 확신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외모, 능력, 윤리와 도덕의 수준에 있지 않습니다. 출애굽 유월절 날, 그가 잘생겼건 못났건, 마음이 곱든 믿든, 행실이 바르든지 옳지 못하던, 선행을 했던지 악행을 했던지, 유대인이든지 아니든지, 그 어떤 조건을 다 마다하고, 오직 하나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그 마음의 인방에 발라져 있느냐? 아니면 없느냐?” 이것만이 유일한 기준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내 영혼에 예수 십자가 구원의 피가 흐르고 있느냐?”입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겉이 아닌 속사람의 마음과 영혼에 물들어 있어야 진짜라는 말씀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경험이나 연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땅의 일을 생각하는 (십자가)의 (원수)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은 복음의 신비 앞에 겸손히 무릎 꿇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율법주의 방식으로 신앙을 과시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 있지만, 여전히 유대교의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성경 말씀을 들먹이며 로마에 맞서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제국의 힘과 부유함을 탐했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하늘의 시민권을 노래하는 듯했지만, 사실은 이 땅 위에 보다 높은 곳에서 더욱 강한 힘을 휘두르길 바랐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며 겸손히 그리고 아픈 마음으로 자신을 향해 되물어야 합니다. 혹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그분의 십자가를 함께 지기 원한다면서도, 정작 십자가 복음의 원수 된 길을 걷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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