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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04.20]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 설교자 | 김봉성 담임목사
  • 설교일자 | 2025. 04. 20.
  • 말씀본문 | 고린도전서 15:1~8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1∼8)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어떠한 의미와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까?


1.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부활이 (기쁨)의 소식이 됩니다.


  죽음을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음을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히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까? 죽음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한 자세가 있을 때라야 비로소 예수님의 부활이 난 기쁨이요, 소망을 불어넣는 메시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실낙원을 쓴 밀턴은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죽음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 궁전의 문을 여는 열쇠다.” 우리도 죽습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문 딱 닫아 놓고 ‘내부 수리 중’이라는 팻말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이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변화되는 부활의 날까지 내부 수리 중 팻말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2. 부활의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어야 참된 부활의 (증인)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 중에는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믿어도 부활을 믿지 않는 교인들이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한 실제 사건이고 이에 대한 수많은 목격자와 증인들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기 자신도 그들 목격자 증인 가운데 한 사람임을 언급하였습니다. 기독교가 핍박의 역사 속에서도 약화되거나 없어지지 않고, 진리의 등불로서 변함없이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독교인들의 우수성 때문이 아닙니다. 비록 박해자이고 핍박자였지만 복음의 원수였던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가 주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시어 영원토록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3. 오늘 우리의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입니다.


  부활이 뜻하는 바는 단순히 다시 오래 산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의미는 단순히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데에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부활은 무조건 다시 살거나 끝없이 사는 것의 차원이 아니라 “어떤 모양의 삶으로 살아가느냐?”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부활! 그것이 기독교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지 않는 나홀로의 부활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사는 것, 어떻게 해서든지 목숨을 오래 부지하는 것에 집착하고 거기에 중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이 부활의 삶이라는 것에 중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옛 삶을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